2014년 1월 10일 금요일

[해리/드레이코/해리] 눈앞이 흐려질 때 (IP13)

제목: Irresistible Poison
작가: Rhysenn
링크: http://www.fictionalley.org/authors/rhysenn/IP00.html
창작일: 2002/6/26
등장인물: 드레이코, 해리
등급: PG-13
작가의 말: 이 글은 본편 13장을 먼저 읽은 후에 읽어 주세요.

이 막간극은 반쯤은 버티컬 호라이즌의 노래 "Give You Back"에 바치는 송픽입니다(여담이지만 Alias의 파일럿 에피소드에 나온 노래예요). 가사가 현재 해리와 드레이코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더라고요.

이 막간극은 본편과 완전히 통합되어서 최종장으로 이어지지만 14장에 관한 스포일러는 전혀 없습니다. 이 글은 13장의 고통스러웠던 키스 이후에 해리와 드레이코가 하는 생각을 따라가며, 여기서 엿보이는 드레이코의 속마음은 13장에 의도적으로 빠져 있었던 드레이코의 입장을 보충하게 됩니다.

베타 리더 Slightlights님과 Minx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Mabelyn(aka Tara)에게 바칩니다... 존재해 주어서 고마워요.






눈앞이 흐려질 때 

 
네가 과연 현실인지 확인해야 해 
내가 워낙 착각을 잘하는 사람이거든
기억이 떠오를 때면
난 늘 암흑 속에서 헤맸다고 말하겠어
나는 이제 네 사람이야

해리는 드레이코가 떠나는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그 소년이 소리 없이 무척 사뿐하게 걸었기에 해리는 그가 가만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살을 에는 한기가 휘몰아쳐 와 한때 열정과 희망이 있었던 공허를 메웠다. 

그림자는 조롱하는 것처럼 고요 속을 소용돌이쳤다. 어두운 교실 사이로 뻗은 슬리데린 기숙사 복도로부터 흘러나온 넓은 빛줄기가 그림자를 흩뿌려 놓았다. 드레이코가 떠날 때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먼지로 뿌연 빛기둥은 가려진 그림자 기둥들 가운데에서 장엄하게 뚜렷이 보였다. 

그는 너무도 바보였다. 

헤르미온느가 옳았다. 대체 그는 이 만남에서 무엇이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일까? 사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튼, 드레이코는 해리가 차마 마음에 담지 못했던 기대마저 박살내고야 말았다. 칼날을 밀어 넣지 않고도 마음을 후벼 파는 새 방법으로. 

그래, 그는 드레이코를 오해했던 것이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한 줄기 쌀쌀한 바람이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의 목 주변을 어루만지며 휘돌았다. 해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저도 모르는 새 반지가 빠지지나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요즘 거의 버릇처럼 하게 된 행동이었다. 

그러나 반지는 없었다. 해리의 손가락이 맨살을 쓸어내렸다. 그 느낌은... 텅 빈,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자기 소유가 아니었던 것에 이다지도 큰 상실감을 느끼는지 이상한 일이었다. 억지로 떠안게 되었고, 일상을- 퀴디치, 공부, 잠, 집중, 무엇보다도 론과의 우정을 망쳐 놓은 무거운 짐의 상징을. 

그렇다면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픈 것일까? 

진심으로 드레이코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차마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 금발 슬리데린 학생은 어느 사이엔가 해리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리가 지금까지, 잃어버릴 때까지 전혀 몰랐던 사이에. 

해리는 드레이코가 바로 전에 입맞춘 일을 생각했을 때 굴욕으로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그 순간의 열기에 모든 것을 녹여 버리고 입맞춤에 몰두하여 드레이코가 불어 넣은 황홀감에 답하였는지, 그러고 나서 어떻게 드레이코가 문득 물러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촌철살인으로 태연하게 그를 거부하였는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드레이코는 일부러 그에게 굴욕을 안겼다. 해리의 기분을 마음대로 주물렀고,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에 앞서 그의 방어막을 벗겨 냈다. 드레이코는 그를 속수무책인 순간에 빠뜨렸고, 그리고 나서 잔인하게 그의 약점을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건 그도 드레이코에게 마찬가지로 했던 짓이 아닌가? 

깨달음으로 내면이 뒤엉켰다. 벨벳 같은 밤하늘의 북녘 빛처럼 희미하면서도 생생한 기억의 아지랑이 속에서, 길을 잃고 해리는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쓰디쓸 정도로 공평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수갑을 채워서 드레이코에게 굴욕을 안겼다. 이름을 새겨서 드레이코가 그의 소유라는 딱지를 붙이는 수갑이었다. 비록 장난일 뿐이었지만, 해리는 드레이코의 눈빛이 증오가 아니라 고통으로 가득한 채 산산조각나 있던 모습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는 드레이코의 기분을 주무를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의도적인 건 아니었지만 퀴디치 경기 때처럼. 드레이코가 사고를 당했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을 떠올리자 오싹하였다. 

이전에 수도 없이 그는 슬리데린 학생을 주체할 수 없는 번민과 갈망에 빠뜨렸다. 그래서 드레이코가 모든 수를 써서 홀리지 않으려 저항하였음에도 드레이코는 해리에게 입맞추려는 것으로밖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해리는 드레이코의 약점을 조롱하였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시종일관 밀어냄으로써 그랬다. 변신술 수업에서 잠깐 빠져 나왔던 그 때 드레이코가 입을 맞춰 오는 것을 물리쳤던 것처럼. 

해리는 눈을 감고 차고 딱딱한 벽에 기대었다. 그늘지면서 밝은 그 기억은 무한정 오래된 것 같았다. 침식해 오는 고통이 물결이 되어 그를 휩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칼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패배감과 후회가 쓰디쓴 깨달음의 상처에서 흘러나와 핏자국을 남겼다. 

아마도 그는 드레이코에게 저질렀던 것 만한 일을 돌려받은 것이었다. 

1대 1 대응으로. 

결국 아마도 그는 드레이코와 함께 할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아 
그저 네가 내가 원하는 전부로 보였어 
그리고 네가 다가오자
모든 것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지 
너는 이제 내 사람이야

드레이코는 빠르게 걸었다. 지하 감옥을 떠도는 싸늘한 공기 때문에 살갗은 눈송이가 입을 맞춘 듯 따끔거렸다. 그러나 겨울 한기 속인데도 정신은 비에 씻기어 깨끗해진 여름 하늘처럼 맑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이주일 동안 해리에게 종속된 상황에 깊게 빠져 있었기에 다시 이성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꼭 안 맞는 새 껍질을 두른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는 금세 해리에게서 원상 복귀한 상태에 익숙해졌다. 무엇보다도 내내 원했던 상태였다. 

해리가 그를 비밀리에 찾기 전에 드레이코는 원상태로 돌아가는 게 단지 시간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정확히 얼마나 모든 일이 끝나길 바라는지 신중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해리와의 만남은 계획했던 그대로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해리를 두고 교실을 성큼성큼 벗어나면서 드레이코는 경계심, 균형 감각, 오랫동안 그래 왔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한층 강한 자기 제어력을 느꼈다. 

그것이 좋았다. 다시 얻은 힘의 감각이 핏속을 아드레날린처럼 치달았다. 그는 그 감각에 기운이 났고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되찾았다. 이제 다른 누구도 필요 없었다. 

그는 해리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드레이코는 그가 자기 자신을 이제 제어할 수 있다는 것, 그가 원하면 어떤 아름다운 환각도 불러낼 수 있고 마음대로 박살낼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리에게 보여 주었다. 마땅히 자신이 자랑스러워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네가 과연 현실인지 확인해야 해 
내가 또 착각했다고 생각하기는 싫어 
그리고 눈앞이 가물거려 오면 
네 눈빛 때문에 눈이 멀었다고 말하겠어 
타오르는 네 눈빛을 느껴 

정신을 차려 보니 드레이코는 어머니의 반지를 가장자리의 곡선 무늬가 살에 패일 만큼이나 손바닥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살짝 늦추고서 반지를 샅샅이 살폈다. 자수정이 희미하게 반짝였고 에메랄드 알은 슬리데린 지하 감옥 벽을 따라 늘어선 횃불의 어스레한 불빛 속에서 깜박거리며 그를 향해서 번득였다. 

에메랄드 빛깔 눈. 

드레이코는 해리가 천천히 반지를 끌러서 돌려 주기 전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응시했을 때 그 눈 속에서 고통과 비참할 정도의 황폐함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드레이코는 해리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강철처럼 굳게 아무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드레이코는 언제 바뀌었는지는 몰랐지만 그와 해리 사이의 균형이 미묘하게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해리만 지금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드레이코는 교실을 떠나면서 한 번도 해리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도 진정으로 만족스럽거나 자신이 흡족하지 않다는 점이 곤혹스러웠다. 심지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내내 해리 포터에게서 승리를 빼앗으려 해 오지 않았던가, 해리가 장애물에 걸리는 것을 볼 때마다 환희로 날뛰지 않았던가? 이번 일은 그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승리였다- 해리가 말 없이 항복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소년의 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 감정 파편을 지켜보는 것. 

그러나 드레이코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꼭 이런 식으로 일을 마쳐야 했는가 하는 아쉬움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사랑의 묘약 사고에서 상처 없이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끝날 도리밖에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많은 것이 연루되어 있었다.  드레이코는 이미 떠나보낸 것 이상을 잃을 위험 부담은 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사랑의 묘약에서 해방된 후 그는 자신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였다- 어느 누구 앞에서든 절대 그렇게 약해지지 않겠다고. 결코 다시는, 평생토록, 같은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진 않을 것이다. 

드레이코는 눈을 감고 추억을 불사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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