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5일 화요일

[샘/카스티엘] 신세계 질서


원제: New World Order
작가: Indigo Night
번역: http://cafe.naver.com/mishacollins/4373, http://cafe.naver.com/mishacollins/2088
페어링: 없음
등급: PG-13
요약: 세계는 붕괴했고, 아무도 막지 못했다. 경고: 4시즌 배경. 종말 이후 이야기, 악마가 된 샘, 등장 인물의 죽음, 죽음, 파괴, 폭력, 유혈, 전반적인 불행.




1.) 그것은 느리게 시작되었다

점차적으로 진행되었다.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조금씩, 그것은 느리게 시작되었다. 워낙 느렸기에, 인간들은 사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해가 희미해지며 사형 선고를 받은 세상에서 철수하는 중이었으나, 인간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과학을, 지구 온난화를 탓했다.

어떤 이들은 왜 신이 그들을 저버렸는지 알려 달라고 빌며 울부짖었다.

(너희들은 오래 전에 잊혀졌다)

“저는 지금 잠자리에 드나이다...”

(그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부디 하느님, 제가 청하는 건 오직...”

(네 말은 그에게 들리지 않는다)

“오 하느님, 저희를 구해 주소서.”

(그는 거기 없다)


2.) 살점

황량한 장소였다. 한때 작지만 번화한 상점가의 소박한 주차장이었던 곳은, 이제 그보다는 완벽한 원 모양의 얕은 크레이터를 더 닮은 모습이었다.

마치 무엇이 나타나서 이 도시 교외 구역의 살점을 희게 바랜 뼈, 고운 석영 모래 말고는 아무것도 안 남을 때까지 모조리 발라낸 것 같았다.

실상 그 물질은 한때 흙이었다. 단단히 눌려서 콘크리트 아래 묻히긴 했어도, 그대로 흙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믿기지 않는 힘에 의해 결정을 이루어, 불가해하고 생경한 것이 되었다.

적막하고, 슬픈 땅이었다. 모래는 무슨 거대한 비극을 목격한 사람처럼 가느다랗게 버석버석 울었다.


3.) 굶주림

붉은색. 비등하는, 비명을 내지르는, 부풀어오르는, 맥박치는 붉은 무리. 거품이 일고 끓는, 날고기와 똑같이 피가 새어나와 흐르는 붉은 무리. 밀어대는, 지옥문을 밀어대는 붉은 무리. 때는 지금이었다!

(우리를 나가게 해 다오!)

어둠은 몰락했다.

(우리가 죽이게 해 다오!)

빛은 죽었다.

(우리를 풀어 다오!)

악마의 시대를 열 기회가 왔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파! 굶주렸다!)

무정부 상태가 장악했다. 아니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왕이다."

그의 눈은 검은색도, 붉은색도, 노란색도, 흰색도 아니었다. 녹색이었다. 금색 반점이 있는 강렬한, 독을 품은 녹색이었다.

군중은 진압되었다.

(예 주인님!)


4.) 떨리면서

소문이 들불처럼 번졌다. 파닥거리는 말소리들이, 잔혹하게 쉿쉿거리는 어두운 목소리들도 투명하게 지저귀는 목소리들도 숙덕거렸다.

(루시퍼님이 돌아가셨다)

//루시퍼가 죽었다//

지옥의 사병들은 겁먹고 분개했다. 여러 당파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많은 자들은 빛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사이 즉각 십수 명의 하급 악마들이 왕권을 주장하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두 번째 말이 떨리면서 비밀 정보망을 타고 전달되었다.

(신이 죽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불신. 공포. 충격. 흥분. 혼란. 소동.

(사실이다)

//사실이다//

(이제 어떻게 되지?)

//이제 어떻게 되지?//

(신왕께서 일어나셨다)

//신왕? 그럴 리 없다.//

(사마엘께서 일어나셨다)

//사마엘//

(우리의 새 주군. 우리 왕.)

//찬탈자. 살해자. 악마.//

(악마. 악마의 왕. 우리 왕.)


5.) 피부

악마 소녀는 누구나 한가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불타는 동안 루시퍼와 손에 손을 잡고 시체 더미 꼭대기에 선 자기 모습을 보는 것.

지옥 전역에 지고한 왕후로 선언되는 것, 아기 피부로 만든 예쁜 드레스를 입고 골수로 만든 티아라를 쓰는 것. 완벽한 판타지와 비슷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수만이 그들의 꿈을 향해 나아갈 무도회에 실제로 참가했다. 지옥의 분노를 사고 저 바깥 천사, 악마, 사냥꾼의 눈을 모두 끌 위험을 떠안은 무도회. 그건 예쁜 악마 머리에다 커다란 과녁을 그리고서 외치는 것과 같았다. "부디 지금 당장 와서 천벌을 내려 주세요."


6.) 부서진

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을 보았다, 부서진 세상을. 내 아버지의 세상은 천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내가 구해내지 못한 자의 손에 의해 죽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이따금 그를 보았다. 그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멋을 낸 머리카락, 구부정한 어깨. 그는 우뚝 서서 붕괴하는 제국을 한껏 즐기면서 지켜보았다.

이제 그는 완전히 악마가 되었다고, 거듭하여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볼 때에, 내겐 악마가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 비치는 건 소년이었다. 경외심을 품고 내게 인사를 하던 소년, 그토록 간절히 나와 악수를 나누고 싶어 하던 소년, 형의 시신을 안고서 울부짖던 소년.


7.) 몸을 숨길 곳

피난민들은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아무리 허술한 보호물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아래에 옹기종기 모였다. 누구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를 예상할 광경이었지만,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린 나머지 벙어리가 되어 불붙은 우박이 그들에게로 쏟아지는 광경을 죽은 신에게 소리없는 기도를 올리며 바라보았다.

마치 어머니 지구가 마침내 인류라는 전염병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결심하기라도 한 듯, 발아래 땅은 진동하고 날뛰었고 건물이 부서져 사람들의 머리 위로 덮쳤다. 피와 주검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이전엔 샘 윈체스터였던 존재는 그 모든 것을 무심한 눈으로, 작게 미소지으면서 바라보았다.


8.) 다정하게

그는 그만두었다, 영영.  악마의 피도, 훈련도. 끝냈다.

그리고 딘은 그를 믿었다.

이제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다시 모든 게 바르게 될 것이다.

그건 딘이 다정하게 귀여운 동생을 끌어안던 그 때, 전율과 비명과 고통이 덮치는 속에서도 굳게 지키던 믿음이었다.

샘은 금단 현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딘에게 그런 증상은 사라질 거라고 확신시켜 주었다. 그냥 시간만 주면.

시간, 그래, 그들이 제 시간에 그 일을 처리했다고 딘은 생각했다, 샘이 선을 넘기 전에 처리했다고.

그러나 그건 금단 증상이 아니었다, 그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 늦었다.

(머잖아 새미, 난 다시 밖으로 나갈 거야. 그리고 딘이 처음이 되겠지.) 


9.) 꾸준히

그녀는 빙글 돌았다. 서늘한 금속 봉이 그녀 배의 맨살에 차갑게 닿았다. 그녀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한 죄를 충족시켜 줄 것을 약속하는 얼굴로 미소를 머금었다.

음악이 강한 리듬으로, 둥둥 울리는 소리를 꾸준히 냈다. 붉게 돌아가는 조명등이 살아 있는 살처럼 맥박치면서 벽을 물들였다. 공간 전체에서 섹스와 폭력, 고통과 오, 그런 달콤한 쾌락이 진동했다. 그녀는 고향을 떠올리게 해 주는 그것이 좋았다.

그녀는 방 안 모든 남자들의 눈이 그녀에게 꽂힌 것을 잘 알면서 춤에 몰입했다. 그 때 방안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남자의 몸은 출입구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그의 존재가 방 전체를 힘으로 메웠다.


10.) 가슴

“메그.” 그가 말했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마치 사탕 맛이 나는 얼음장 같았다.

“새미.” 무대에서 내려와 뽐내는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그녀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는 그녀의 노출된 가슴을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 눈길을 음미했다. 그에게서 발산되는 힘이 그녀의 피부를 휩싸며 그녀를 공포와 예감으로 떨게 했다. “네가 언제 나를 찾아올지 궁금했어. 결국, 우린 실질적으로 남매잖아.”

클럽 안 모든 이들의 눈이 그들에게 꽂혀서 그들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믿어지지 않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의 목을 뜯어내고 피 흘리는 그녀를 바닥에 버리고 떠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11.) 동족

봉인 65개가 깨어졌다. 어리석게도 지상 주민 대다수는 임박한 종말을 감지하지 못하고 일상을 살아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혜택 받은 소수는 공황에 빠졌다.

악마들은 기뻐 날뛰며 모여들었다. 천사들은 대세가 된 흐름에 맞서 싸웠다.

마지막 하나가 깨어지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해방된 루시퍼, 그는 도전받게 될 것인가?

소문이 무성했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는 그들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마왕과 싸우기 위해 강림할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럴까?

카스티엘은 그렇게 갈망하는 동족들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자리를 비운 어버이를 굳게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12.) 움찔했다

(내가 그리웠어?)

마음속으로, 샘은 움찔했다.

꺼져.

(아, 그게 네 다른 반쪽에게 인사하는 법인가?)

입 닥쳐. 꺼져.

(머잖아 난 밖으로 나갈 거야.)

내가 널 놔두지 않아. 형이 널 놔두지 않아.

(딘이 항상 그 자리에 있진 않을 거야, 새미.)

샘은 눈을 감고 목소리를 물리치려고 의지력을 끌어모았다. 차가운, 무자비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넌 날 이길 수 없어 샘.)

난 언제나 이겼어.

(물론, 한두 번은 그랬지. 하지만 난 여전히 여기 있다고. 언제까지나 그럴 거고 말이지.)

좋아. 거기 있어라. 그렇지만 넌 나오지 못할 거다.

(결국엔, 너도 내게 동조하게 될 거야.)

절대 그럴 일 없어.

(내가 이길 거야.)

넌 이기지 못해.


13.) 돌진

그 일은 너무 빨리 일어난 나머지, 아무도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보지 못했다. 거기에  그가 있었고, 탁 트인 장소에, 아무 무기도, 아무 방비책도 없이, 그 바보가, 다음 순간엔,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자를 붙잡을 생각을 하기도 전에, 어리벙벙하게 흐르던 정적을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소리가 깼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샘은 무기를 떨어뜨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트인 공터를 내달렸다.

천국과 지옥의 병력이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 그의 양 편에 강림하여 싸우는 중에, 그는 형의 시체를 떠받쳐 안고 원시적인 울부짖음을 내질렀다.

딘의 죽음이 그의 내면에 있던 무엇을 산산조각냈다. 그래서 샘은 주먹을 갈기려 앞으로 돌진했다가, 다시 뒤돌아 달렸다.


14.) 불쑥

그가 그를 찾았을 때 카스티엘은 사과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캐스." 그는 나른하게 비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새뮤얼." 카스티엘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저편 멀리 분홍빛 구름, 붉은 피가 뚝뚝 듣는 구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새뮤얼 윈체스터는 죽었어요. 이제 사마엘이죠."

"그래, 악마의 왕이지. 그래서 날 죽이러 여기에 왔나?"

"아니오."

"왜 죽이지 않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감상적인 놈이라고 비웃어 보시죠." 놀리는 투였다. 그는 불쑥 카스티엘의 입술을 덮쳤다. 산(酸)을 부은 것처럼 타들어가는 입맞춤이었지만, 그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렇게 뱀은 이브에게 사과를 건넸다.



Sentimentalist by ~JeminaMoonNight on deviantART


15.) 지친

그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으나, 그녀는 보고 있었다. 가끔 그들은 그녀에게 들리기를 기원하며 기도를 드렸지만, 결코 정말로 들으리라 믿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끔은 그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행하는 부끄러운 짓을 그녀가 모르기를 바라며 그녀가 보지 못하기를 필사적으로 기원했다.

그들이, 그녀의 아이들이, 그녀의 남편이 몰랐던 것은, 그녀가 언제나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녀는 절대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 때문에 소름이 끼쳤고, 그들이 고른 나쁜 카드의 운명 때문에 슬펐지만,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지치고, 가슴이 찢어지고, 얻어맞고 멍드는 모습을, 이윽고 그들이 다시 몸을 추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6.) 욕지기

똑.

피와 내장의 쇠비린내가 집에서부터 길을 따라 멀리로 풍겼다. 그는 총을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계단을 올랐다. 문은 간신히 경첩에 매달려 있었다. 피가. 피와 창자가. 파티장에 장식하는 색띠처럼 천장 환풍기에서 늘어져 있었다. 벽에는 피가 흘러내렸고, 죽음에 관한 미치광이 오행시가 적혀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처럼. 시체가, 사방에, 하여간 시체 조각이 널려 있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똑. 똑.

구석에 그가 웅크리고 있었다. 옷은 찢어지고 손은 선혈에 젖었으며 적갈색 줄무늬가 으스스한 인디언 전투 물감처럼 천천히 뺨을 흘러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모르겠어, 형, 기억이 나지 않아.”


17.) 끈적한

가끔 샘은 꿈을 꾸었다. 그는 박동하는 심장과 피 흘리는 벽이 나와, 노래하고, 괴성을 지르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그 주위로 솟아올라 박동하고, 그를 들어올리고, 기뻐 날뛰고, 그의 이름을 환호하는 꿈이었다. 그 이름은 진짜 그의 이름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기분이 좋았다.

“사마엘, 우리 왕 사마엘.”

그들은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그에게 아기의 피가 든 술잔과 처녀의 심장이 담긴 접시를 바쳤다. 그들은 내장으로 만든 왕관과 머리털을 엮어 만든 망토를 주고서 뼈로 된 옥좌에 그를 앉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끈적한 땀에 젖어 깨어났다. 그러나 그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그가 그것을 열망한다는 사실이었다.


18.) 척추

그녀는 그의 왕후가 될 것이다, 그게 계획이었다. 그녀는 그를 일에 대비해 훈련시키고,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힘을 쓰는 법, 힘을 열망하는 법, 지배하는 법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녀는 정말로 그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악마가 사랑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기나 하다면.

그 비인간적인 두 녹색 눈을 바라보자 그녀의 모든 꿈이 실현되었다는 전율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올랐다, 흥분이, 기쁨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 쥐는 그는 여전히 샘 윈체스터처럼 느껴졌다.

그는 몸을 숙이고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메스꺼운 갈보년.” 그리고 그녀의 목을 꺾었다.


19.) 왈칵

두근-쿵... 꿀럭... 왈칵... 둑... 꼬르륵... 두...

정적.

섬세한 속눈썹이 주근깨가 난 뺨을 쓸었다. 반투명하고 푸른 눈꺼풀이 밝은 녹색 눈을 덮었다. 진홍색 피가 회색 콘크리트를 물들였다.

“날 떠나지 마.”

먼지로 더러워진 뺨 위를 눈물이 구불구불한 냇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죽었어.)

아냐.

(넌 그를 잃었어.)

아니야.

(그는 돌아오지 않아.)

죽임당한 심장은 조용했다. 부서진 심장은 천천히 멎었다.

그 목소리는 비정하지만 달래는 투였고, 부드러웠고, 위안이 되었다.

가슴이 아파.

(내가 낫게 해 줄 수 있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손가락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움켜쥐고 있었다.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좋아. 네가 이겼어.

그리고 그 목소리는 원시적인 비명을 발하며 풀려나 신세계 질서의 막을 열었다.


20.) 망연자실

엘렌은 구부러진 십자가 두 개 곁에 서 있었다. 바비가 그녀의 옆에, 조가 다른 한쪽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 중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그녀는 자신이 뭐라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통이든, 공포든, 분노든.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녀는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300km 밖에서 폭발을 느꼈다. 그녀는 혜성으로 보이는 물체 둘이 난데없이 나타나 쏜살같이 외딴 주차장으로 떨어지더니 서로 부딪히는 장면을, 세상을 끝장낸 폭발이 이어지는 장면을 보았다.

나치 모양으로 꺾어진 십자가 두 개만 남아 있었다, 윈체스터 형제가 거기 있었다는 하나뿐인 증거였다.


21.) 벽

지금 카스티엘은 은과 석재로 쌓은 벽 뒤에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이곳을 궁궐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한때 그가 직접 윈체스터 형제에게 가르쳐 주었던 바로 그 봉인 문양들은 벽에 그려져 이 장소를 새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 유명한 상아탑 높은 곳에 서서 세상을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자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형제들은 거의 다 절멸했다. 그런데도 무슨 숭상받는 애완동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는 여기 살아남았다.

그의 내면 깊숙한 구석은 이런 짓을 저지른 끔찍한 괴물을 증오하고 싶었다. 아마 그가 예전의 샘을, 그 소년을 잊을 수만 있다면 그러기도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천사란 태생부터 증오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22.) 쓰라린

“샘, 이건 좋지 않아.”

“내가 그들을 죽였어.” 갈라진. 쓰라린. 속삭임.

“우린 누구 짓인지 모르잖아.”

“내가 한 거야.”

“뭐가 기억나?”

“아무것도.”

“기억이 비기 전에는 뭐가 생각나는데?”

시선을 외면하기.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어디 있었어?”

“루비와.”

“약을 하러?”

침묵.

침묵.

오래 아주 오래.

마침내.

“그만둘 거야.”

“지난번에도 똑같은 말을 했지 않냐.”

“정말이야.”

“이 말도 네가 한 다른 약속처럼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할래?”

“날 죽여.”

목에 돌덩이가 걸린 기분이다. 무겁다. 딱딱하다. 숨을 쉴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배를 졸라매는 기분이다. 두렵다. 절망적이다. 메스껍다. 해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좋아. 마지막 기회야.”

“약속할게.” 진심으로.


23.) 손목

조는 움직이지 않고, 긴장해서, 기다렸다. 그녀가 타고난 본능이 그녀 등 뒤에 선 누군가, 무언가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의 손은 단도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건 은으로 된 물건이었고, 많은 사냥감들에게 효과가 있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것이 뭐든, 그 단검은 적어도 그놈의 움직임을 느리게는 해 줄 것이다.

그녀는 기다렸다. 마루판이 그녀 뒤에서 삐걱거렸다. 그것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녀는 팔을 쳐들고 단도를 조준하면서 홱 몸을 돌렸다. 그러나 힘센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공중에서 꼼짝 못하게 했다. 심장이 덜컥 멈추며 그녀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녹색 눈을 바라보는 순간 공포가 그녀를 옭아맸다.

“샘.”


24.) 까진

딘은 삶이 훨씬 단순했던 시절을, 새미의 가장 큰 문제가 까진 무릎이었던 시절을 기억했다. 무릎에 뽀뽀해 주고, 상처에 밴드를 붙이면, 다 해결되었다.

딘은 귀여운 동생을(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그의 눈엔 언제까지나 귀여울 것이다) 보았고, 이제는 모든 것이 너무도 어려워져서 감당하기 힘들다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새미가 금단 증상을 겪는 내내 몸을 떨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았고, 매일 밤 그가 뒤척거리는 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뽀뽀 한 번으로 이런 일도 해결될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다 내줄 수 있었다. 사나이의 거북함 따위는 지옥에나 가라지!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쉽게는 해결할 수 없었다.


25.) 빛

그들은 그를 소유하고, 조종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많은 고깃덩이들처럼. 갖고 놀 꼭두각시로.

더 이상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이 그가 이용하고선 쓰레기가 된 양 내다 버릴 수 있는 그의 소유물이었다.

그는 그들을 싫어했고, 꺼렸다. 그럼에도 그들의 비명소리는 마음에 들었다.

그는 빛과 어둠을 절대 차별하지 않았다.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그들 모두가 조그맣고 어리석은, 그들의 우주 정복 장기의 졸에 불과한 인간보다는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신이 제대로 된 도구를 찾기만 한다면, 천사와 악마는 그리 다르지 않다. 알고 보면 그들은 모두 붉은 피를 흘린다.


26.) 턱

“천사로 사는 건 어떻죠?”

카스티엘은 몸을 돌리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악마로 사는 건 어떻지?”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요.” 사마엘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차가워요. 아무리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여 있더라도, 그 속은, 늘 시리죠.” 슬픔 가까운 것까지도 비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카스티엘의 턱에 닿아 그를 납치한 장본인과 억지로 마주보도록 얼굴을 돌리는 그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그 손에 만져진 뺨은 타서 그슬고 물집이 잡혔다.

“하지만 당신은,” 악마의 왕이 혼잣말을 했다. “당신은 언제나 무척 따뜻했었죠. 좀 나눠 주실래요?”

카스티엘은 그저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외면하려 애썼다.


27.) 긴장 풀기

“왜 나를 당장 죽이지 않지?” 그녀가 말을 내뱉었다. 화난 다섯 마디 말은 그녀의 지친 몸 속 증오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담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 그는 능글맞게 웃었다. 으스스한 기분으로 어둠을 생각하는 그녀를 향해 독을 품은 눈이 반짝였다. “네가 필요하거든.”

“나는 절대로 너를 돕지 않을 거야!” 그녀는 격렬하게 맹세했다.

그는 한바탕 크게, 딘의 맥주에 할라페뇨 주스를 넣는 그를 그녀가 도왔던 그때만큼이나 따스하게 웃어젖혔다.

“긴장 풀어, 네겐 선택권이 없으니까.”

돌연 그는 그녀 뒤에 서서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새빨개진 그녀를 자신의 탄탄한 몸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속삭였다. “네가 내게 남은 하나뿐인 희망이야.”


28.) 뜀

카스티엘은 그를, 자신을 납치한 장본인을, 그가 아끼는 전부를 살해한 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가진 힘을 모두 끌어모아 눈빛에 담았지만, 여전히 시선은 약하고, 무력했다.

악마는 그저 재미있는 듯 그에게 능글맞은 웃음만 너그럽게 보냈다. 그는 한 발짝 가까이 내디뎠고, 그의 존재에 서린 힘이 일으킨 파문이 카스티엘을 뒤덮었다. 너무도 견디기 어려운, 모순된 힘이었다. 고통과 기쁨, 반감과 병적인 갈망.

그릇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목에서 맥박이 두근두근 뛰면서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물러서고 싶었고,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 선명한 녹색 눈에 사로잡힌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29.) 삶 

바비는 수없이 목숨을 건지며 삶을 이어왔다. 그는 월남전에서 살아남고,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헤아릴 수 없는 친구들을 가끔은 두 번 이상 잃고, 윈체스터 형제에게 휘말려 떨어진 그 모든 미친 상황에서 헤어났으며, 영혼까지 팔았다. 그는 천사와 악마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망할 놈의 종말. 젠장, 그는 하다못해 신보다도 오래 살았다. 

자신의 목숨을 끝내 거두어 가는 상대가 폐암일 줄은, 아니면 자신이 빨대로 젤리를 먹으며 침대에 누워 마지막 며칠을 보내게 될 줄은 그는 몰랐다. 그리고 만물을 지배하는 악마의 왕이 자신의 임종 병상을 찾아와서 “안녕히 가세요, 바비 아저씨.”라고 속삭일 줄은 그는 꿈에도 몰랐다.


30.) 소모

딘은 자신이 이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리사에게 곧 다시 만나자고 말했을 때 그는 알고 있었다. 바비에게 모든 일이 끝나면 다 같이 어디 낚시하러 가자고 말했을 때 그는 알고 있었다. 조에게 네가 결혼하는 날에 식장에서 함께 춤을 춰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는 알고 있었다. 샘에게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약속했을 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 약속들 중 단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타고난 아홉 개의 목숨을, 그 이상을 소모했다. 때가 닥쳐왔다.

그는 죽음을 너무 여러 번 속였고, 이번에는 정말로 죽음의 여신이 그를 따라잡았다. 그러나 그는 얌전히 가지는 않을 참이었다.


31.) 얼굴

지옥에 떨어지고부터 거의 삼백 년이 흘렀다. 학대와 고통으로 탈바꿈되는 삼백 년. 그녀가 가졌던 인간성을 어느새 거의 모두 살라먹은 삼백 년.

그녀는 세상의 다른 부분의 소란에 신경을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종말과 천사와 신은 털끝만큼도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이 끝나지 않는 고문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녀의 고문이 마침내 끝나고 고문대에서 풀려나는 날, 지옥은 혼란과 파멸의 소용돌이였다. 혼돈이 사방을 지배했고 새뮤얼 윈체스터의 미소 띤 얼굴이, 변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똑같은 그 얼굴이 그녀 위 공중에 맴돌고 있었다.

"안녕, 벨라."


32.) 느낌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했다.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말한들 뭐가 좋아질까? 엘렌이  아들로 생각하던 두 청년을 이미 손수 묻은 마당에, 왜 어머니가 간직한 그들의 추억을 훼손해야 하는가? 어머니는 둘 모두가 평화롭게 죽었다고 믿도록 두자.

그러나 조는 추억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때 그녀는 그들 둘 모두를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었다. 지금은...

그녀는 아직도 허리에 그가 팔을 둘렀던 윤곽에서 지져지는 듯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나약해지는 느낌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의 몸을 껴안아 그 부위를 가리려고 했다.

"어떻게,"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 의문에 잠겼다. "내가 그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거지, 내 안에 단 하나의 희망도 없는 지금?"


33.) 불평

크로울리는 자칭 악마의 왕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 자신의 죽음을 예기했다. 그간 왕은 악마 전체를 휩쓸며 무차별로 살해해 왔기에 도달하기 어려운 결론은 아니었다.

실망스럽겠지만, 그는 죽음 앞에서 불평할 인물은 아니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 그만은 신왕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사마엘이 힘의 파장으로 그를 등뼈부터 갈아 버리는 대신 그를 진급시키며 멋드러진 새 코트를 내밀었을 때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왜?" 그는 자신이 찾아온 운을 걷어차는 줄 알면서도 질문을 했다.

사마엘은 방탕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 스타일이 마음에 들더군."


34.) 가두다

"왜 날 붙들어 두는 거지?"

"당신이 저를 완전하게 만드니까요."

"진지하게 묻고 있다."

"저도 그래요. 당신은 제 어둠과 대비를 이루는 빛입니다. 저와 싸우는 건 그만두세요."

"그럴 순 없어."

"우리가 처음 만나던 무렵 당신은 최전선에 서는 일개 보병에 불과했죠. 하지만 저는 당신을 그보다 훨씬 더 큰 존재로 만들 작정이에요. 저는 당신을 신으로 만들 겁니다."

"나는 신이 되고 싶지 않아."

"바로 그거예요. 바로 그 점 때문에 당신이 완벽한 거죠."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

"하게 될 겁니다. 결국에는 당신도 여기 탑 속에 갇혀 고통받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것에 지칠 테고 거래를 할 준비가 되겠죠."

댓글 2개:

  1. 악마 샘이라니!좋아요!그런데 이게 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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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 작품이 2011년부터 연중되었습니다...ㅠㅠ
      사실 드라마가 너무 먼 길을 가서 이제 뒤를 잇기도 애매할 것 같기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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