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1일 일요일

[안나/카스티엘] 가호



 제목: Saving Grace
 작가: IronyRocks
 구분: 번역
 장르: Het
 페어: Anna/Castiel
 등급: PG-13
 경고: 5시즌 4화까지의 스포일러, 종말, 폭력(Violence)





"사나운, 어두운 시대가 우리를 향해 덜컹거리며 다가온다. 그러니 새로 묵시록을 쓰길 소망하는 예언자는 완전히 새로운 짐승을 지어내야 할 것이고, 그 짐승이 너무도 끔찍한 나머지 성 요한의 고대 짐승 상징은 그에 비하면 구구 우는 비둘기나 큐피드 같아 보일 정도여야 할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 "루테시아. 혹은, 파리." 아우크스부르크 신문, 1842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카스티엘은 이상스럽게도 평온하고 고요한 기분이었다. 이것이 피치 못할 숙명이라면, 그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으리라. 대천사에게 감히 도전하면서, 그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머리를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결코 의심한 적 없는 아버지에게 축복 기도를 올렸다. 새하얀 빛이 폭발하자 그의 손 살갗은 반투명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그는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안전하게, 다친 데 없이, 그가 겪은 곤경을 드러낼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채로.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떤 평화로운 순간이, 천국이나 지옥이나 오랫동안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를 얼핏 볼 틈이 있었는지, 글쎄, 카스티엘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타오르는 빛 가운데에서 깨어나자 카스티엘은 대천사가 그를 죽이지 못했음을 알았다. 다만 대천사를 능가하는 힘을 지닌 것은 이 우주에 너무도 많았다.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앞으로 걸을 길은 길고 혹독할 것이다.




루시퍼가 깨어나던 때, 안나는 지구 반대편 팔루자 외곽의 아수라장이 된 작은 마을에 가 있었다. 거기에는 파티마라고 하는, 여덟 살이 채 되지 않았고 녹색 눈과 앞일을 내다보는 특별한 자질을 지닌 작은 소녀가 있었다. 안나는 그녀를 지켜야 했지만, 집 벽에 포탄이 명중하고 멀리서 수류탄이 폭발하는 전장을 뚫고 아이를 호위하는 중에, 무언가가 안나의 주의를 흩어 놓았다.


정체 모를 컴컴한 전율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고, 그녀는 위험 전조를 찾으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단단한 포장도로를 때리는 가운데, 거죽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는데도 얻어맞아 부서진 것 같은 기분으로 안나는 하늘을 응시했다.

"그가 여기 있어요." 파티마는 겁에 질려 숨을 죽이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가 피를 원해요."

"그가 누구니?"

"루시퍼예요." 그녀는 훌쩍였다. 




이제 무엇을 하지?


그는 반역했고 그에게는 의지할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그의 발아래 놓인 길은 아무도 앞서 밟지 않은 길이었고 지식으로 예측할 수도 없었다. 세상의 끝이 도래하기 전까지 카스티엘은 실수만 수없이 저질렀을 뿐이었고, 따르던 명령은 이제 적의 것이 되었다. 천사들은 그의 적이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갔고, 카스티엘은... 회의를 품었다.

그건 가슴이 메는 듯한 맛이었다.  




오마하에서 며칠 후, 상쾌한 밤공기는 길 가운데를 따라 걷는 안나의 살갗에 서늘하게 와 닿았다. 동네는 조용했고, 가로등은 깜빡거렸고, 희미한 날개 치는 소리만 천사가 그녀 곁에 내려섰을 때에 들렸다.


"난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카스티엘은 어째서 느끼게 되었는지 자신도 다 모르는 감정을 눈에 내비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소멸되었다는 아주 과장된 소문이 돌더군."

"구원받았구나." 안나는 깨달았다.

카스티엘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타락천사로 여겨지는 처지였다. 안나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빠짐없이 계산하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 곁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안나는 그가 무심코 하는 버릇을 꼽아낼 수 있었다. 그의 낯빛은 스치듯 변했을 뿐이나, 그녀는 카스티엘이 스스로에게까지도 감추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복잡한 내면을 지녔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깨우쳤다. 그녀는 언제나 그 속을 그대로 꿰뚫어보았다.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침묵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무렵 카스티엘이 고백했다. "너무도... 정처 없이 헤맨다는, 아무것도 확신이 없다는 기분이 든다."

그녀는 이 고통을 알았다.

"그건 네가 수천 년 동안 갇혔던 눈먼 믿음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때에 일어나는 일이야."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이제 난 믿음을 버려야 하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육천 년 전, 카스티엘은 처음 그녀에게 왔다. 그 당시 그의 모습은 지금과 달라서, 머리는 칠흑같이 길고 검었고 눈은 연한 푸른빛이었으며, 발치까지 늘어진 흰색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그를 그녀 날개 아래 받아들일 무렵에도 그는 기품 있고 영리했으며, 무척 젊고 열의도 넘쳤다. 그녀는 카스티엘에게 첫 임무를 주었고, 그는 긍지를 갖고 복종했다.

"넌 구원받았어, 그렇지?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해, 카스티엘. 지금은 살을 에는 것 같겠지만, 시간을 두고 봐야 해."

"우린 시간이 없다." 카스티엘이 반박했다. "주둔군이 집결했고 우린 수로도 힘으로도 상대가 안 돼. 즈카르야는 매 순간 휘하 병사를 늘리는 중이고 루시퍼는 지상에 단단히 발 디디고 서 있지. 대천사들이 곧 도착할 거다. 우린 그들 모두와 싸울 수는 없어."

"우린 싸워야만 해." 안나가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우린 도움이 필요하고."

"우린 마지막 남은 둘이다. 단둘. 나머지는 모두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




카스티엘은 딘에게 돌아갔고, 거기서 그는 십중팔구 죽음으로 이어질 만남을 기다렸다. 라파엘의 힘은 유명했고, 그와 격돌해서 카스티엘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 딘은 오늘밤은 타락과 사악한 간음을 차례대로 하자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에 응답했다.
카스티엘은 수많은 세월을 살았지만 전에는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짜로, 한 번도 안 했냐?" 차를 타고 가면서 딘이 외쳤다. "너 물건은 있잖아, 그렇지? 여자를 흘끔거리고선 그걸 써먹어 보자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카스티엘은 꿈지럭거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려 애썼다. "인간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기에 그런 관계는 막혀 있었다."

"동료 천사는? 그들하고는 사귈 수도 있었지 않냐, 안 그래?"

그는 곧바로 안나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상관이었지만, 곧 그의 친구가 되었던 천사. 타락하기 전에 그녀는 그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고, 그 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카스티엘은 이제서야 뒤늦게, 그 감정이 반역의 씨앗임을 인식했다. 딘이 그 감정을 길러 열매를 영글게 했지만, 맨 처음 씨를 뿌린 사람은 안나였다.

딘은 씩 웃었다. "뭐, 운 좋은 날인 줄 알아라. 드디어, 오늘밤 네 총각 딱지를 떼 줄 테니까."
카스티엘은 그 계획이 무너졌을 때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도 안심했다고는 딘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안나는 파티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니? 겁먹은 것 같아 보이는구나, 아가."

"그가 덫에 걸린 일 때문에 화를 내요." 소녀가 털어놓았다.

"누가?"

파티마는 안나의 허리에 매달렸다. "라파엘요."




카스티엘이 라파엘과 대면하고 돌아왔을 때, 
안나는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아는지 몰랐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안나는 언제나 천사들 중에서도 가장 수완 좋은 축에 들었다. 그녀가 추락했다는 사실에 그리도 마음이 어지러웠던 까닭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됐어?"

카스티엘은 그녀가 물은 말을 무시했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화염 고리는 라파엘을 오래 가둬놓지 못할 테니 조만간 탈출할 거다. 그러면 그는 날 찾아오겠지. 우린 떨어져 있는 편이 현명해."

어쨌든, 그렇게 하는 편이 그녀가 더 안전할 것이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캐스." 안나가 반론했다. "게다가, 흩어지면 죽는다. 기억하지?"

"그렇다면 특별한 예방책을 강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판단이야."

"좀 늦었어, 넌 그렇게 생각지 않아? 루시퍼가 부활하는 순간 우리가 보통 쓰던 효과적인 예방 조치는 대부분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고."

"뭐라도 가려서 위장할 수는 있지 않나?"

"알아." 안나가 말을 잘랐다. "날 믿어, 나는 납작 엎드리는 법을 잘 알아. 난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숨을 수 있어. 난 이 일을 너보다 오래 했잖아, 기억해? 날 믿어."

카스티엘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믿는다."




일주일 뒤, 그녀는 하마터면 식언할 뻔했다. 그녀가 브리즈번에 혼자 있을 때 천사 브리아소스가 그녀를 찾아냈고, 그녀에게 사방으로 발길질을 거세게 퍼부었다.

무너진 교회의 검게 그을린 잔해 곁에 의기양양하게 서서, 브리아소스는 성경을 인용했다. "한 민족이 일어나 딴 민족을 치고 한 나라가 일어나 딴 나라를 칠 것이며 곳곳에 무서운 지진이 일어나고 또 기근과 전염병도 휩쓸 것이며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굉장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루가복음 21장 11절.

흠씬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 막힌 목으로 억지로 말을 뱉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루가복음 21장 17절.

그녀는 그의 턱에 주먹을 내질렀고, 브리아소스는 한 대 맞고 뒤로 휘청했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며 보충해서 덧붙였다. "좆까."
 



어느 날 아침, 카스티엘은 스크램블드에그와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안나를 만났다. 외딴 곳에 떨어진 작은 식당에서, 일찍이 딘이 밥을 먹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그는 그녀가 식사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좀 먹을래?" 스크램블드에그를 포크 가득 떠서 들고 그녀가 물었다.

카스티엘은 불안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그녀는 집요하게 미소를 지었다. "긴장 풀어, 캐스. 선악과 같은 거 아니니까."

얼마간 뜸을 들인 후, 그는 앞으로 몸을 숙여 포크에 입을 가져가고는 천천히 씹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간을 더 쳐야겠군."

그녀는 더 활짝 미소 짓더니 급기야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갈가리 찢긴 도시를 세 개째 본 날부터,  
안나는 사흘 밤을 의혹으로 가슴을 태우며 한숨도 자지 못하고 보냈다.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녀 가슴 속엔 언제나 의혹이 있었으니까- 아니면 적어도, 그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추방된 반역자. 의문을 토로하는 목소리. 결코 듣지 못하는 확실한 답. 안나는 결코 자족하며 눌러앉지 않았고, 그건 처음엔 주둔군을 통틀어 그녀야말로 지휘관 자리에 적격이라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불확실함을 곰씹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혼자 지냈다, 다른 누구와 어떻게 그것을 공유해야 할지 그녀는 잘 몰랐다. 카스티엘이라 해도. 그도 같은 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회의를 품은 지가 얼마 안 되었고, 그의 신념은 깨어지기 쉬웠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불안까지 나누어 주어 그에게 짐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녀는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그녀는 기도했다.




하마터면 너무 늦을 뻔했지만 이번에도 딱 제시간에, 카스티엘은 딘을 즈카르야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그러나, 무언가 변했다. 마치 시간여행 여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양, 딘의 심기가 어지러움을 그는 감지했다.


그들은 길가에 서 있었고, 딘은 핸드폰을 꺼냈다. "새미?" 딘이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어. 우리 만나자."

카스티엘은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기근이에요." 파티마는 울면서 경고했다. "사람들이 너무 굶주려서, 너무도 절망적인 처지에 몰릴 거예요.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요."


"쉬이." 안나는 파티마를 달래면서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디니, 파티마? 내게 말해 주렴?"




카스티엘은 전화를 끊었고, 이윽고 거의 예고도 없이 딘의 차 뒷좌석에 나타났다. "딘, 샘." 그는 형제에게 인사했다.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럴 줄 알았어." 핸드폰을 닫으면서 딘이 대답했다.

"왔어요, 캐스." 샘이 인사했다.

"널 보는 게 기쁘지 않다는 말은 아닌데, 캐스, 지금은 때가 별로 좋지 않아. 우린 방금 콜트를 찾을 실마리를 잡았다고."

"더 중요한 걱정거리가 있다. 또 다른 기수야." 카스티엘이 정보를 주었다. "기근이다."

딘은 눈동자를 굴렸다. "멋지군. 아주 그냥 존나게 멋지군 그래. 어디야?"

"서부야. 아마 캘리포니아일 거다. 지난주부터 그곳에 나타났지."

"어떻게 알았죠?" 샘이 물었다.

"안나가 말해 주더군."

딘은 잠시 멈추었다. "애나? 너 애나랑 연락하고 있었냐?"

"그래."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카스티엘은 어리둥절해서 딘을 보았다. "묻지 않았잖은가."




딘은 애틀랜타에서 콜트를 추적하라고 그들을 보냈다. 
안나는 몇 달 동안, 사실은 거의 일 년 가까이 딘을 만나지 않았는데, 이유는 거지반 캐스가 제대로 보호 주문을 새긴 탓에 천사는 아무도 윈체스터 형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 연락하려고 든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지만 딱히 연락할 이유가 그녀에게 없었을 뿐이고, 어쨌거나 연락 여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카스티엘이 끊임없이 그와 연락하는 중이었고, 그들 둘 모두 그거면 충분했다.

카스티엘이 전화를 끊었고, 안나는  통신사 대리점에서 그가 자기 목적에 알맞은 핸드폰을 사려고 애쓰는 우스운 모습을 언뜻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녀는 그가 문자도 보내는지 궁금했다.

"악마들에게 접근하려면 해질녘까지 기다려야 한다." 카스티엘이 말했다. "우리가 다가오는지 저들이 알아채서는 안 되니까."

"너 정말 콜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아니." 카스티엘이 대답했다. "하지만 딘이 부탁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모퉁이를 돌았다. “샘은 어떻게 지내?”

“잘 적응하는 중이라고 딘이 그러더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의심이든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것은 지나간 일을 헤집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둘 모두 잘 알았다.

그들은 인도를 걷다가 종말을 설교하는 술 취한 남자와 마주쳤다. “들었소? 종말이 찾아왔다오, 친구! 그래도 자책하진 마쇼. 당신 잘못으로 종말이 온 건 아니니까. 아니 사실, 세상 모든 이의 잘못이니 당신 잘못도 똑같이 있긴 하겠소. 글쎄, 제기랄, 어쩌면 우린 미국인이니까, 다른 사람 잘못보다는 우리 잘못이 더 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마쇼! 오로지 당신만의 잘못은 아니니까! 당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말이오. 그렇다면야 당신 잘못일지도 모르지.”

늘 그렇듯이 사실을 전달하려는 태도로, 카스티엘은 그 사람 앞에 멈추어 섰다. “오바마 대통령은 세상의 종말과 다가올 루시퍼의 치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럴 리 있나!” 그는 빈 병을 공중에다 휘두르면서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되질렀다. “쓸데없이 동정심 많은 진보주의자 패거리들 때문에 세상 모든 이는 죽게 될 거야!”

카스티엘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안나는 팔꿈치로 그를 슬쩍 찔렀다.




어느 날 카스티엘은 한번 잠을 자 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잠에 든다 해도 그에게 평화는 조금도 찾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세상 만물 가운데 그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단 한 번, 파티마는 희망과 기쁨이 어린 눈으로 
안나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도움이 찾아올 거예요.”

“그러니?”

“어떤 여자예요.” 파티마가 대답했다. “메리 윈체스터요.”




느닷없이 라파엘이 나타났고 카스티엘이 맨 먼저 꼬리가 잡혔다. 힘센 손아귀가 목을 움켜쥐었고, 꼼짝 못하도록 붙잡힌 그는 벽에다 메어쳐졌다. 라파엘의 힘은 카스티엘이 항상 잘 알고 있었듯 압도적으로 그보다 강했다.


“배반.” 라파엘이 노호했다. “너는 해충 같은 것들을 위해 동족을 저버렸다. 그런 신성모독을 하다니, 뭘 위해서였지? 누구를 따를 셈이었나?”

“우리 아버지.” 카스티엘은 목숨만 겨우 붙어서 컥컥거리며 말했다. “난 아버지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다.”

라파엘은 손아귀를 풀었고 카스티엘은 바닥에 맥없이 털퍼덕 무너졌다. “아버지는 종적을 감추었어. 우릴 상관하지 않거나, 돌아가셨겠지. 어느 쪽이든 중요치 않다. 우린 혼자야, 카스티엘. 우린 한참 동안 혼자였어. 너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카스티엘은 손으로 땅바닥을 짚으면서 올려다보았다. “난 결코 믿음에서 등을 돌리지 않아.”
라파엘은 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아주 오래 전엔,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내 믿음은 천국 그 자체만큼이나 흔들리지 않았지. 인류에게 들러붙은 증오, 피, 학살, 잔인함, 그 밖의 온갖 죄도 다 참아낼 수 있었어. 다만 방치되는 중이라는 사실만은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카스티엘? 왜 아버지는 네 믿음에 보답하지 않지? 그분은 어디 계시지?”
그 말을 들은 카스티엘은 주춤했다.

“믿음이란 내 이익을 쫓고자 갖는 것이 아니야.” 카스티엘은 몸을 일으키면서 주장했다. 눈앞은 흐릿했고, 다리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후들거렸다. “나는 나를 구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아. 오직 온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행동할 뿐이다.”

라파엘은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세상 모든 것은 이기적이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고 순진한 노릇이지. 그렇기에 나는 대천사가 되고, 너는 곧 죽을 신세가 된 거다.”

카스티엘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마침내 이 순간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어서 죽여라.”

라파엘이 다가왔다. “걱정 마라. 잠깐 동안은 사무치게 고통스럽겠지만, 곧 모두-”

하얀 빛이 눈앞을 메우더니, 카스티엘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안나와 함께. 안도한 그는 무릎이 풀리면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의 옆구리를 붙잡아, 흠씬 맞은 그의 몸을 근처 의자로 인도했다.

“널 만나러 오는 중이었는데,” 안나가 설명했다. “벌써 선수를 친 이가 있는 게 보였어.”




“라파엘은-”

“우리 털끝 하나 못 건드려.” 안나가 안심시켰다. “여기서는. 내가 결계를 쳐 놨거든. 편하게 있어, 캐스. 푹 쉬어.”

카스티엘은 라파엘이 공격한 몸 곳곳에서 좀체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움츠리며 눈을 감았다. 상처를 돌보는 동안, 피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안나는 손가락을 자꾸 헛짚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아팠지만, 그의 몸은 이미 회복되는 중이었다. 허나 그녀는 그의 마음과 근심은 몸보다 낫기가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무얼 해야 하지, 안나?” 그는 실의에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성전을 벌이는 중이야.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 거지?”

그녀도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다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쉬어, 캐스. 넌 회복해야 해.”

그녀가 방 밖으로 발길을 돌리자, 카스티엘은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딘이 기근을 죽였다. 샘이 정복을 죽였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카스티엘은 마지막 기수도 머지않아 나타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카엘이 지상에 내려왔다는 정체 모를 뜬소문이 퍼졌다. 딘은 요즘 들어 훨씬 더 마음이 뒤숭숭한 모양이었고, 카스티엘은 혹시 미카엘이 꿈에서 그를 찾아오지는 않는지 궁금했다.


딘은 하겠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카스티엘은 확신했다.

“우린 그 빌어먹을 콜트를 반드시 찾아야 해.” 딘은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

형만큼이나 지쳐 파김치가 된 기색으로, 샘은 머리카락 속을 한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카스티엘은 샘이 무슨 꿈을 꾸는지 감히 어림짐작해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으나, 루시퍼가 무얼 보여주며 그를 유혹할지 상상만은 할 수 있었다.

카스티엘은 이런 확신이 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긴 했지만, 이것도 확신했다. 샘은 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팔루자로 돌아간 그녀는 파티마의 작은 시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광경을 목격했다. 바닥에는 그을린 자국이 있었고, 공기 중에는 희미한 유황 내가 떠돌았다. 목이 멘 안나는 따끔따끔 아릿해지는 눈으로 그 조그마한 형체를 바라보았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다. 일곱 살밖에.

그녀는 멤피스로 카스티엘을 찾아갔다. “남은 건 이게 다야?” 그녀는 갈라지고 불안정하면서도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폭력, 비참, 끝없는 죽음? 이게 다야?”

그녀는 더 고함치고 싶었다. 이 모든 일에서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왜 그분은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지? 왜 그분은 우리가 이 일을 단둘이 하게 하시지?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나.”

다 안다는 듯 카스티엘의 목소리는 조용했기에 안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이 나약함임을 알았다. 그녀는 이것이 옹졸한 의구심임을 알았다, 온 세상이 불타는 이 때 어린 여자아이가 한 명 더 죽었다 한들 뭐가 대수일까? 그 생각은 쓰디쓴 산이 되어 목구멍 속에서 타들어갔고, 그녀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참았다.

너무 버거웠다, 너무 버거웠다, 너무 버거웠다, 이건 너무 버거웠다-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그녀는 허물어졌고, 이윽고 그녀는 격렬하게 그를 끌어안고서 입술을 그의 입술에 부딪쳤다. 그가 깜짝 놀란 것이, 그가 받은 충격이 느껴졌지만 애나는 그의 망설임을 자신의 단호한 태도로 눌렀다. 세상에는 한번 나아가기 시작하면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 있고, 그들은 수천년 동안 그 길 위를 지나왔다. 그녀는 두 사람의 몸이 벽에 부딪칠 때까지 밀어붙였고, 그녀의 혀가 그의 입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그가 끊어질 듯 신음을 내자 그녀는 과열 상태로 빠져들었다.

몇 분이 지나고, 숨이 찬 그들이 떨어졌을 무렵, 카스티엘의 음성은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어조가 되었다. “안나.”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지금 그는 숨가쁘고 혼란스럽고 달아오른 목소리였다. “안나?”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든 그의 욕망이 자신의 허벅지를 누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것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그는 몰랐기에, 안나가 그를 인도했다. 그녀는 그가 입은 트렌치코트를 홱 잡아당기고 재킷도 벗겼다. 한 마디도 없이 시선과 손길만으로, 그녀는 그를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그의 허리 위에 양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았다. 그녀의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여 있었고, 그녀는 매듭을 풀어 붉은 폭포수가 흘러내려 얼굴에 드리워지도록 했다.

그녀가 그의 옷을 벗기며 자기 옷도 벗는 동안, 그의 목소리는 갈망으로 눌려 나직하고 숙연한 말투가 되었다. “난 잘 몰라... 한 번도...”

“쉿.” 그녀는 입술을 겹쳐 말을 막으며 속삭였다.




아침에, 카스티엘은 잠든 안나의 몸에 감싸여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은 그가 결코 손에 넣지 못한 사치였고, 그래서 그는 그 기회를 대신 안나를 생각하는 데 썼다. 그들 둘은 시간과 운명 속에서 십자로 겹쳐져 수놓인 두 가닥 실이었고, 이제 그들은 돌에 단단히 새겨진 선을 넘어 함께 누워 있었다.


오래 전, 카스티엘은 그녀야말로 주둔군 신분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발치까지 닿을 천사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녀야말로 어둠과 모든 회의를 뚫고서 그를 인도해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녀는 그에게 길을 알려 줄 것이다.

수천년이 지나고서도 여전히, 그녀야말로 자신에게 내려진 가호(saving grace)가 아닐까 그는 생각해 보는 때가 있었다.




몇 주 후에, 안나는 로마에 콜트가 있다고 악마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서 그리로 갔다. 소문은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그녀는 그 소문을 잠시 동안 미국을 떠나 있을 구실로 삼았다. 다른 대부분의 지역과는 달리 로마는 아직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녀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 의문은 오래 끌지 않았다.


로마에서 이틀을 지낸 다음날, 한 천사가 그녀를 찾아냈다.

“안녕, 안나.” 인사를 건네는 그가 깃든 임시 그릇은 벌써 이음매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녀 눈에도 분간이 되었다. “오랜만이군.”

안나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안녕, 미카엘.”




카스티엘은 톨레도로 향하는 길에서 샘 딘과 다시 합류했는데, 그곳은 음산한 분위기가 자욱했다. 루시퍼는 서반구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승리를 거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크로톤 바이러스는 오하이오 주의 세 도시를 넘어 퍼졌고, 조수석에 앉은 샘은 혹시나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기치 않은 말썽에 휘말릴 경우에 대비해서 산탄총을 손에 들었다.

진득한 침묵이 오래도록 내려앉았고, 얼마가 지나자 카스티엘은 이 긴장은 길 위에서 온 것이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싸웠군,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는 금세 정정했다. 또 싸웠군.

“그래, 캐스.” 짐짓 쾌활한 태도를 꾸며 지으며 침묵을 깨고서 딘이 말했다. “요샌 어떻게 지내냐?”

카스티엘은 생각에 잠겨서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침내 그는 뭐라고 대답할지 결정했다. “안나와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하마터면 차가 도로를 이탈할 뻔했다. 샘이 기침을 하면서 어색하게 어, 그거 참, 잘 됐네요- 운운하며 대답하는 동안 딘은 재빨리 차를 갓길에 댔다. 문득 카스티엘이 정신을 차려 보니 형제는 모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딘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진짜로?”

카스티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숙하게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두 번 했지.”

형제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것 같았다.

“우리 애가 다 자라서 총각 딱지를 떼는구나.” 딘은 흐뭇하게 말했다.




“이렇게 일은 귀결될 수밖에 없어, 안나. 모두 혈통으로 인한 거지.”


“받아들일 수 없어.”

“받아들이게 될 거다. 그러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내릴 테니.”



딘과 샘이 잠을 자는 동안 카스티엘은 모텔 창문 앞에서 보초를 섰다.

둘 모두 악몽을 꾸었다.




종말이 닥쳐왔을 때, 안나는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녀는 1974년 어느 시점에서 메리 윈체스터를 빼내어 35년 후인 현재 시간대로 데려왔다. 메리는 아름다웠고, 짧게 친 금발머리는 턱 근처에서 굽이쳤고, 노란 무릎길이 민소매 여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존 윈체스터에게 그녀는 갓 결혼하여 행복에 찬 아내였지만, 안나는 이 여인이 소위 발그레한 새색시라고 하기엔 순진무구함과도 근심걱정 없는 해맑음과도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내가 뭐하는 거지?” 사냥꾼다운 태세로 안나와 맞서면서 메리가 다그쳐 물었다. “넌 누구야? 넌 뭐야?”

“난 천사야.” 안나가 대답했다. “마왕이 계약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고 2009년으로 당신을 데려왔지.”

숨을 멈춘 메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짜냈다. “아자젤?”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그 애가 없어졌어!” 거의 미친 사람처럼 딘이 분통을 터뜨렸다. “한밤중에 자다가 깼는데, 새미가 씨발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는 거야.”


“어디 갔는지 아나?”

“어딘지 안다면, 캐스, 내가 문의전화 1588-1004에다 전화 걸었겠냐? 그 애를 찾아야 해.”

카스티엘은 창밖에 붉게 물든 아침노을을 내다보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딘은 턱을 악다물고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적대감을 짓씹더니, 말했다. “도와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있는 대로 다 불러. 루시퍼야. 뼛속에서부터 느껴진다고.”




그녀는 오래 전에 예언을, 필연을- 사악하고 뒤틀린 운명의 손길을 믿기를 그만두었다.


아니 그만두었다고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이틀을, 이틀 내내 줄곧 찾아다닌 끝에 딘과 카스티엘은 마침내 샘이 앨버타 주의 작은 마을에 있다는 단서를 찾았다. 그곳엔 크로톤 감염자가 우글거렸고, 카스티엘의 눈엔 마치 공기 중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덩어리 같은 악의가 마을을 에워싼 광경이 보였다.


“샘은 분명 가장 물샐 틈 없이 경비하는 장소에 있을 거야.” 딘이 말했다.

카스티엘은 악마들이 겹겹이 지키는 교회가 서 있는 마을 광장 끝을 건너다보았다.




안나는 메리 윈체스터가 악마의 등에 훌쩍 올라타서 산탄총을 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격을 막고 다시 발포해 몸집이 메리의 두 배는 되는 다른 악마를 바닥으로 도로 동댕이치면서 그녀가 빙글 돌자 머리카락이 왕관처럼 머리 둘레에서 너울거렸다.


“도망쳐!” 안나가 자기 몫인 악마와 격투하면서 소리쳤다.

“당신이 이놈들 전부와 싸울 순-”

“뛰어, 메리!” 벽에 세게 메어붙여지면서 안나가 요구했다. “샘에겐 시간이 없어!”

이대로 간다면 어떤 결말이 온다는 뜻인지 메리는 알아들었음이 틀림없었다. 선택지를 따져 볼 시간도, 두 사람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울 시간도 이제는 없는 것이다. 악마는 너무 많고, 그들은 둘뿐이었다.

메리는 열린 문으로 달려 나갔다.

안나는 계속 싸웠다.




교회 안에서 그들이 악마 시체 더미에 둘러싸여 선 안나를 발견했을 때, 카스티엘은 다른 무엇의- 다른 누구의 존재를 감지했다.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낯익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안나의 설명을 듣고 카스티엘은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딘만큼이나 놀랐다.


“뭐라고 했냐?” 얼굴이 벌게진 딘은 귀를 의심하며 거칠게 소리쳤다. “너 방금 내 어머니라고 했어?”

아마 딘이 조금 더 놀란 모양이었다.

딘은 폭발하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를 악문 채로 간신히 말 몇 마디를 내뱉었다.

“정리 좀 해 보자. 새미가 마왕을 물리치도록 힘을 보태 줄 수 있게 하려고 네가 어머니를 35년의 시간을 거슬러 데려왔는데, 그러고서는 악마와 싸우다가 어머니를 놓쳤다 이거야?”

안나는 주춤했다. “놓친 게 아니야. 메리는 도망쳐서 샘을 찾으러 갔어.”

“어디로 갔는데?”

“모르겠어.” 안나는 달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메리 윈체스터가 죽는 일은 어느 쪽도 바라지 않으니까.”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깨달은 딘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카스티엘은 보았다. 메리는 두 그릇의 어머니였다, 하나는 루시퍼의 그릇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카엘의 그릇. 천사도 악마도 1974년을 살던 메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가 두 아들을 낳기 전에는.

“그녀는 둘도 없는 존재야.” 카스티엘이 동의했다. “혈통부터가. 그녀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거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그녀 단 한 사람만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안나는 딘이 형성한 한랭전선이 무슨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일년 반 만에 딘을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무슨 그리움 따위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뜻밖의 이야기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여겼다. 그들은 교회에 방어선을 만들기로 했다, 비록 이상적인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몇 가지 선택지를 미리 훑어보는 동안에도, 딘은 여전히 금방이라도 바깥으로 폭발할 것처럼, 아니면 속으로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애나는 어느 쪽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카스티엘은 잠깐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가 올 때까지 그녀를 기다렸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는 찬동하지 않았다. “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간을 흐트러뜨리지 말았어야 했어. 이 일로 뭐가 바뀔지 짐작도 못하겠군. 그녀는 메리 윈체스터야.”

그는 이천년 전 또 한 사람의 마리아에게 드렸던 것과 똑같은 공경을 담아 그 이름을 말했다.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날 믿어, 좋은 예감이 들거든.”

카스티엘은 그녀를 응시했다.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있나, 안나?”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번쩍거리는 번갯불.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 비탄에 차 윙윙 이는 바람과, 흔들리고 진동하는 발밑 세상. 강대한 자의 존재감이 사방을 메웠다. 멀리서는, 악마와 천사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온 세상이 하나같이 비명소리를 내는 중에 그 모두와 동떨어진 채 작은 교회는 서 있었다.


“미카엘이 여기 왔어.” 안나가 말했다.

카스티엘도 알고 있었다. “루시퍼도 왔지.”

둘 다 임시 그릇을 쓰고 있었다. 둘 다 진정한 그릇을 찾고 있었다.

딘은 한 손으로 머리칼을 문질렀지만, 카스티엘이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딘의 눈빛은 강철처럼 차가워졌고 녹색 눈동자는 선명해졌다. 딘은 등을 뻣뻣이 굳히면서 눈으로 교회 바깥 포장도로와 흰 보도를 날카롭게 훑었지만, 폐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결연한 얼굴이 되어 주머니에서 희미한 빛을 내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너희 둘은 여기 있어.” 문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며 딘이 명령했다.

“딘, 기다려.” 카스티엘이 그를 멈추어 세웠다. “계획은 있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일이 벌어지는 동안 교회 안에 꼼짝 못하고 갇혀 있진 않겠어. 밖엔 우리 가족이 있다고.”

“그래도 계획은 있어야지.” 안나가 주장했다.

“하나 생각해 보지.” 딘이 안심시켰다. “너희 둘은 여기 있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너희 둘이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도와. 콜트를 찾아서 저 개새끼들을 싹 죽여 버리라고.”

딘은 홀로, 열린 문 밖에 깔린 문명의 잔해를 넘으며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카스티엘과 안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카스티엘은 불현듯 본격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일제히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제 우린 뭘 하지?”

“기도하자.” 안나가 대답했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안나에게 그 문구는 거의 잔혹한 농담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이번만은 냉소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서, 카스티엘과 함께, 두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땅이 다시 흔들렸고, 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것 느꼈어?” 경건한 어조로 카스티엘이 물었다.

카스티엘만큼이나 경건하게, 안나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 그래, 느꼈어.”




아버지는, 어머니인 것으로 밝혀졌다.


마을 구석으로 간 그들이 거기서 샘과 딘을 찾아냈을 때, 형제들 곁에 우아하게 선 여인은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메리 윈체스터의 고운 얼굴 그대로였지만, 껍데기 내면의 존재를 느낀 카스티엘과 안나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메리 윈체스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의 그릇이었다.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미카엘과 루시퍼가 깃들었던 임시 육신은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딘과 샘은 백짓장처럼 해쓱해 보였지만, 눈앞에 서 있는 형체에 너무 압도된 나머지 카스티엘은 그랬는지 거의 알아채지도 못했다.

결국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에필로그


이건 안나가 상상하던 결말과는 달랐다. 하긴,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변했고, 세상은 외침과 기도와 희망과 절망이 어우러져 흘러갔고, 아무것도 예언과 같이 끝장나지 않았다. 메리 윈체스터는 깨끗이 기억을 지우고 다시 순수한 영혼이 되어 자신이 왔던 시간으로 돌아갔다. 보통은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릇은 식물인간이 되고 말지만, 글쎄...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권능이 있으셨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다.

그녀가 그를 알고 지낸 세월 중 처음으로, 카스티엘은 잠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그녀의 벗은 어깨 곡선 위에 머리를 두고, 부드럽고 고르게 숨을 쉬었다. 그녀는 그가 무슨 꿈을 꾸는지 궁금했지만, 악몽일 리는 없었다. 그래, 오늘밤은 그럴 리 없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 확신과 불신을 뚫고, 지금 안나는 자신을 씻어내는 비길 데 없는 평화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도 똑같은 느낌임을 알았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 어린 눈물로 눈시울이 아렸다.

이것이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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